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발터 폰 브라우히치 (문단 편집) ==== [[독소전쟁]] ==== [[파일:external/s-media-cache-ak0.pinimg.com/dbe999fbe7ca8d2700e1ce91a4e0baff.jpg|width=400]] ▲ 1941년 4월 [[빌헬름 카이텔]](左), 브라우히치(中), 아돌프 히틀러(右). 한편 브라우히치는 군사 작전의 시행에 일일이 간섭하는 히틀러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서로 충돌하는 일이 잦았다. 브라우히치를 위시한 독일군 장성들은 소련의 수도 [[모스크바]]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히틀러는 [[우크라이나]]의 [[키이우|키예프]] 일대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지하 자원이 많은 데 대해 눈독을 들이고 모스크바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. 당연히 브라우히치는 격렬히 반대했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지 않았고 모스크바에 가해지는 공세는 불안정했다. 결국 [[모스크바 공방전]]에서 패배하고 [[페도어 폰 보크]], [[하인츠 구데리안]]의 후퇴를 허가한 책임을 물어 브라우히치는 육군 총사령관에서 경질되고 히틀러가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. 지병으로 [[심장병]]을 앓고 있던 브라우히치는 독소전쟁 기간 중 갑자기 [[심장마비]]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잦았고 육군 총사령관에서 해임된 이후에는 다시 히틀러를 만날 수 없었다. 히틀러는 브라우히치를 "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병자 같은 놈"이라고 공공연하게 욕하고 다녔지만 정작 브라우히치는 와병 중에서 총사령관 업무를 수행했을 만큼 성실한 인물이었다. 이후에는 [[프라하]]에서 요양 생활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, [[1944년]] [[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]][* [[루트비히 베크]]는 이 작전이 실패한 후 자살하였다.] 이후 히틀러에게 현역 복귀를 희망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[[1945년]]에 종전을 맞이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